"헉...!"
눈을 번쩍 뜨자 제일 먼저 천장이 눈에 들어왔다. 아무로는 멈추고 있던 숨을 천천히 내쉬며 부릅떴던 눈을 조심스레 깜박거리기 시작했다.
아, 또 가위에 눌렸던 거로군.
"꿈인가...."
아무로는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리면서 몸을 일으켰다.
아침이면 언제나 겪는 일이지만, 이런 식의 기상은 결코 적응이 될 만한 일이 아니다. 시트는 온통 땀으로 축축하고, 몸은 늘어져서 도무지 말을 들어먹지 않으니까. 게다가 간밤에 꾸었던 꿈은 늘 꾸곤 하던 꿈과 전혀 다른 것이었다. 매일 꾸는 것만도 지겨운데 이놈의 악몽은 이젠 새끼를 쳐서 레퍼토리라도 늘리려는 건가? 만일 그게 사실이라면 중독의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병원에서 진정제 처방을 받고야 말겠다!
...아니. 그게 아니면 최근 들어 몸이라도 안 좋아진 건가? 세월아 내월아 하고 푹 퍼져 살아온 나머지 몸이 허해져서? 그렇다면 한의학 병원에 가서 체질 감별을 받은 다음 보약 한재 지어먹는 편이 빠르다던데. 그러고 보니 얼마 전에 프라우 보우, 아니 이제는 프라우 고바야시 부인이구나. 하여간 그녀가 전화 통화에서 하야토에게 얼마 전에 보약을 먹이느라 좋은 병원을 수소문했다는 소리를 들은 적도 있는 것 같다. 결혼해서 잘 살고 있는 청년에게 웬 보약인지는 몰라도, 하여간 약 지었다는 병원을 한번 물어나 볼까.
"...귀찮아."
아무로는 어깨를 으쓱 한 다음 침대 바닥에 발을 내려놓았다. 그러자 시키지도 않았는데 자동으로 커튼이 젖혀지면서 강렬한 햇빛이 방으로 밀고 들어왔다. 그리고 이내 집사가 방문 밖에서 말을 걸어왔다.
"일어나셨습니까? 아침 준비는 어떻게 할까요?"
"곧 씻고 나가겠습니다. 오늘은 커피 말고 우롱차로 주세요(건강을 챙겨야 한다!). 기지에는 못 가볼 것 같다고 연락해 주시고."
"알겠습니다."
집사의 발걸음 소리가 멀어지자 아무로는 샤워실로 곧장 들어가는 대신 침대에 주저앉은 채 이번의 집사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잠드는 시간만큼이나 일어나는 시간 또한 천차만별인 아무로의 다음날 기상시간을 매일 꾸준히 맞춘다는 건 아무로 자신에게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것을 이번의 집사 역시 어렵지 않게 해내고 있는 것이다. 처음 집사 노릇을 하는 사람이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 또 당한 거겠지, 역시.
첫 번째 집사는 일거수 일투족을 녹화하여 정리한 뒤 군에 보내고 있다는 것을 들킨 뒤 바로 잘렸다.
두 번째 집사는 카메라 위치를 바꾸다가 걸려서 그 날로 짐을 쌌다.
세 번째 집사는 꽤 오래 머물렀지만, 차가 고장나서 뜯다가 우연히 통신기가 튀어나오는 바람에 해고되었다.
이런 식으로 최근 일 년 동안 집사만도 무려 일곱 명이 바뀌었다. 한때는 하도 징글징글해서 혼자 살아보려고도 했지만, 그때마다 납득하기 힘든 사고가 터졌다. 돌풍으로 유리창이 죄다 깨진다던가, 비가 와서 도로가 침수되는 바람에 준비해둔 식료품이 없어서 구호차량이 올 때까지 이틀을 굶어야 했다던가 하는 식이었다. 결국 아무로는 이 재앙에 두 손 들고 새로 여덟 번째 집사를 들였다. 가정부를 추가로 들일 필요가 없도록 일부러 몰래 신문광고를 내서 나이든 부부를 골랐지만, 한 달도 못 되어 미심쩍은 부분이 생겨 버린 것이다. 이렇게 된 이상 며칠 주의해서 지내다 보면 증거가 나올 게 거의 확실해 보였다.
- 뭐어, 눈치 채일 정도로 성실하다는 점에서는 처음 해본다는 말이 맞는 것 같기도 하지만.
어쩔 수 없는가보다, 하고 아무로는 한숨을 쉰 뒤 샤워를 하러 들어갔다.
자신이 감시를 받고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을 때는 불쾌했고, 실망했고, 격노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런 감정도 만성적인 것이 되고 말았다. 어차피 아침에 제시간에 일어나지도 못하고 악몽을 꾼 후 침대에서 어린아이처럼 훌쩍이는, 전형적인 전쟁 후유증 환자의 일상을 보고하는 게 뭐 그리 대수이겠는가 싶기도 했다. 어떤 사람이 들어오든 마찬가지일 거라면 굳이 다른 사람으로 바꿀 필요가 있을까.
샤워를 마치고 나오자마자 집사가 방안으로 새 옷을 들고 들어왔다.
"아침은 어디서 드시겠습니까?"
"여기에 차려 주세요."
"알루르 양과 드시지 않으시겠습니까?"
"아."
아무로는 입을 다물었다. '알루르 양'의 일은 아예 잊고 있었던 것이다. 요 근래에 이곳이 휴양지로 인기가 좋아졌는지 여러 사람들이 단체로 놀러오는 일이 꽤 잦아졌는데, 가끔 피치 못할 사정으로 호텔 대신 아무로의 집이나 혹은 이 근방의 다른 집에서 묵어 가는 경우도 있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묵으러 집에 들어오는 사람들이 하나같이 젊은 여성이라는 점이었다.
처음에는 쑥스러운 나머지 말도 제대로 못 걸고 그녀들을 피해 도망을 다니던 아무로였지만, 이제는 제법 익숙해져서 새로 만나는 아가씨들과 은근히 농담을 주고받는 일에도 점차 익숙해지고 있었다. 어차피 간단한 식사와 방을 제공한 다음, 뒷일을 죄 집사 부부에게 맡겨 놓기만 하면 금새 착한 사람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큰 노력 없이도 젊은 여자들에게 구세주 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걸 신이 내려주신 행운이라 생각해버리면 그만이었다.
그렇지만 익숙해 졌다고 부시시한 얼굴인 채 같이 아침 식사를 할 정도는 아직 아니다.
"식당에 챙겨 드리세요. 저는 그냥 여기서 먹겠습니다."
집사의 얼굴에 묘한 기색이 조금 돌았지만 아무로는 그것을 못본 척 하고 옷을 갈아입으며 시계를 보았다. 0083년 11월 22일 오전 10시 24분, 기지에 놀러라도 가보기엔 너무 늦은 시각이었다. 어차피 그가 가건 안 가건 돌아가는 데에는 별 차이가 없는 기지. 열심히 신경을 써 줘야만 할 필요는 없었다. 그래도 나이 지긋한 하사관들에게 전화는 한번 해 줘야 하지 않을까 싶었지만, 드문 일도 아니니 그냥 그러려니 할거라는 생각이 들어 그는 결국 반쯤 들었던 수화기를 다시 내리고 말았다.
* *
집사가 날라온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정원으로 나간 아무로는, 그전부터 하던 자가용 비행기의 보수를 시작했다. 그러나 못해도 두어 시간은 정신을 팔 수 있겠거니 하고 생각했던 그 일에도 30분이 채 못되어 손이 멈추었다.
'엔진을 좀 작은 걸로 바꿔 달아도 되지 않을까...이제는....'
원래 이 비행기는 후라우와 하야트의 결혼식 때 아무로가 축하를 겸한 깜짝 곡예비행을 해 주기 위해 자작으로 만들기 시작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 작업은 왠지 예상보다 하루 이틀씩 늦어지기만 했고, 정작 결혼식 전날에서야 곡예용으로 계산했던 엔진이 예상했던 것보다 출력이 너무 작다는 데에 생각이 미쳤던 것이다. 엔진을 교체하는 작업을 밤새도록 했지만 결국은 곡예 비행을 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결혼식에 그냥 참석하는 데만도 허둥지둥 가다가 하마터면 지각을 할 뻔했다.
땀 뻘뻘 흘리며 식장에 뛰어들었을 때는 얼마나 미안했던지 모른다. 무슨 언론인입네 하면서 글을 휘갈겨 먹고사는 예전 동료 가이 시덴은 '병신 삽질하네'라는 한마디로 표현해 버리고 말았지만.
나중에서야 그런 어이없는 실수가 행복한 두 사람에 대한 질투에서 비롯되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다지 인정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리고 또 인정한다 해도 이미 늦은 일이었다. 그 일로 사이가 틀어진 세 꼬마와는 아직도 화해를 하지 못하고 있으니 말이다.
"멋진 비행기네요!"
"병신 삽질의 산물인걸요."
"네?"
"아, 아닙니다. 알루르 양, 맞으시죠? 제가 이 집 주인 됩니다."
"얘기 들었어요. 아무로 레이 씨라면서요? 토크쇼에서 뵌 적이 있는 분 댁에 묵게 될 줄은 몰랐어요."
"네에...."
느닷없이 나타나 말을 걸어온 아가씨는 꽤나 당돌한 성격을 지닌 듯 했다.
"언제 완성되죠? 저도 태워주실 수 있나요? 친구들한테 자랑해 봤으면 좋겠어요. 아무로 레이 씨와 단둘이서 비행기를 타 보았다고 말이에요."
아무래도 당돌한 게 아니라 뻔뻔스럽기까지 한 것 같다.
"3-4일은 더 걸려야 할 것 같은데요. 아직 엔진이 완전하지 못해서."
"어머, 신세만 질 수 있으면 그정도는 있을 수 있는 걸요."
아무로의 목소리에 가시가 돋쳐도 그 아가씨는 별로 신경 쓰는 기색이 아니었다. 전후 3년 내내 휴가다운 휴가를 못 써 봤다는 둥, 이번에는 마음먹은 만큼 실컷 놀다가 갈 거라는 둥 뒤에서 이런저런 잡담을 해 대면서 비행기 옆을 떠나지 않았다.
아-아. 자가 비행기 만드는 사람 처음 보나. 비행기에 태워서 차라리 저 멀리로 던져 버릴까보다.
아무로는 시선을 돌리기가 싫어 스패너를 손에 든 채 나사를 조이는 시늉만 하고 있다가 문득, 이 비행기를 몰고 확 도망가 버릴까 하는 궁리를 시작했다. 그것은 군의 감시자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난 이후로 줄곧 머리를 떠나지 않던 상상이었다. 상상하는 것만큼은 어차피 엿보기도 불가능할 테고.
그 동안 감시를 하는 사람들이나 방법 따위는 대충 살펴 두었고, 뉴타입이란 결국 별 거 아니라는 인상도 계속 줘 왔던 탓에 감시망 자체가 점점 느슨해지는 것도 느끼고 있던 터였다. 잘만 한다면, 여기저기로 숨어 다니면서 가이처럼 눈에 띄지 않게 살 수 있을런지도 몰라. 아무로는 묘한 기쁨 같은 것을 느끼며 엔진은 그대로 둔 채 비행기 조립을 끝내기로 마음먹고 진지하게 엔진의 결합 상태를 점검하기 시작했다.
그 때 집사가 전화기를 들고 나타났다.
"아무로씨, 기지에서 전화입니다."
"기지에서요?"
아무로는 놀라서 집사로부터 수화기를 받아들었다. 자다가 봉창 두들기는 것도 아니고 이게 무슨 일인지.
"네, 아무로 레이입니다."
"아, 아무로 군인가? 날세! 안 나오고 뭐 하는가?"
"아, 소위님이십니까? 오늘 일직이세요?"
전화를 걸어온 사람은 그를 항상 '아무로 군'이라고 부르는 나이든 소위였다. 자신을 애 다루듯 하기는 했지만 마음 씀씀이가 좋은 사람이라 아무로는 제법 그에게 호감을 갖고 있는 편이었다.
"응, 오늘이 내 일직날이지. 그런데 자네 좀 나와 줘야겠어."
"무슨 일 있습니까? 저는 쉴까 했는데요."
"어제 다 부서진 콜로니가 하나 지구로 떨어진 모양인데, 그게 어떻게 된 게 북미 대륙이라더구만. 인명피해가 별로 없는 모양이니 큰 일은 아니지만, 진도(震度)자료 따위를 올려야 하지 않겠나. 난 프로그램 같은 데는 워낙 젬병이라서 말이야! 자네가 좀 와 줘야겠어."
"네? 콜로니가 떨어졌다고요?"
"그렇다니까! 자세한 건 모르겠고, 스페이스노이드들이 한 짓이라더군. 오늘 못 올 것 같으면 내일이라도 나오게나. 보고 올리는 덴 자네 손이 좀 필요할거야."
"...알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다음, 아무로는 잠시 멍하니 수화기를 손에 든 채 꼼짝도 하지 못했다.
그러면 아침에 꾸었던 그 꿈은 꿈이었던 게 아니라....
콜로니가 대지로 서서히 접근하고 있었다. 콜로니의 외벽에서 깨져 나온 파편의 조각들은 무리를 이루어 콜로니와 함께 자브로 상공 위로 사라져갔다. 대기권에서 반짝거리며 불타올라 소실되어 가는 유리 조각들은 마치 별의 조각들을 흩뿌린 것처럼 보였다. 점점이 불타오르다 금새 사라지던 파편들.
- 지온이겠지.
그런 일을 할 사람들이 이 지구권 다른 어디에 있을 수 있겠는가. 아니 꼭 지온은 아닐런지도 모른다. 다른 테러 집단이 그런 일을 도모하고 실행에 옮겼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지온 외의 다른 누군가가 콜로니를 지구로 떨어뜨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지구에 스스로의 집을 던져버릴 수 있는 악당들, 그것에 바로 지온이고 스페이스노이드였다. 방금 전 전화를 걸어온 소위 또한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 않던가.
- 그들은 절대로, 자기들이 어떤 짓을 한 건지 알지 못할 거야.
정확한 정보를 갖고 있거나 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아무로는 그들이 떨어뜨린 콜로니 덕분에 연방의 분위기가 더욱 강한 친 어스노이드 인사에게 힘을 몰아주게 될 것이라는 점을 예측하고 있었다. 스페이스노이드와 공감대가 형성되었던 장군 한둘쯤은 책임을 지고 물러나야 할 테고, 어쩌면 테러를 담당하는 특수부대가 새로 생길지도 모를 일이다.
그리고 결국 감시는 더욱 강해질 테지. 이제는 결코 달아날 수 없을 것이다.
근거 없이도 충분하리만치 밀려오는 패배감.
아무로는 나지막히 한숨을 쉬었다.
"왜 그러세요? 뭐가 잘 안 되시나요?"
"아 네, 엔진을 좀 작은 걸로 갈아야 할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너무 무리하지 마세요. 잠깐 쉬어요. 저한테 이 동네 안내라도 좀 해 달라구요."
아무로가 처음으로 그녀 쪽을 돌아보자 그녀는 윙크를 해 보이며 한 걸음 앞으로 다가왔다. 그녀는 꽤 예쁜 편이었다. 긴 머리가 반쯤 드러낸 가슴께까지 찰랑거렸다.
연방에서 여자들을 자신에게 보내는 것은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 계절에 관광지로 유명하지도 않은 이곳에 휴가를 온다는 여자들이 그렇게 많을 리가 없겠지. 그것은 집사가 자신을 감시한다는 것만큼이나 분명하게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더욱 가까이 하기 어려웠던 것이었는데.
"아침은 드셨습니까? 점심이라도 같이 하실까요?"
"좋아요!"
그녀는 큰 소리로 웃은 뒤 스스럼없이 아무로의 팔에 자신의 팔을 끼었다. 팔짱을 낀 채 현관을 스치고 지나가면서, 아무로는 집사의 입가에 살짝 미소가 걸린 것을 볼 수 있었다. 분명 자기 목이 무사하게 되었다는 안도감에서 나오는 웃음이겠지.
그러나 이제 아무려면 어떻겠는가. 누구나 바라는 것은 단지 오늘의 안녕 뿐.
아무로는 더 이상, 저항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눈을 번쩍 뜨자 제일 먼저 천장이 눈에 들어왔다. 아무로는 멈추고 있던 숨을 천천히 내쉬며 부릅떴던 눈을 조심스레 깜박거리기 시작했다.
아, 또 가위에 눌렸던 거로군.
"꿈인가...."
아무로는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리면서 몸을 일으켰다.
아침이면 언제나 겪는 일이지만, 이런 식의 기상은 결코 적응이 될 만한 일이 아니다. 시트는 온통 땀으로 축축하고, 몸은 늘어져서 도무지 말을 들어먹지 않으니까. 게다가 간밤에 꾸었던 꿈은 늘 꾸곤 하던 꿈과 전혀 다른 것이었다. 매일 꾸는 것만도 지겨운데 이놈의 악몽은 이젠 새끼를 쳐서 레퍼토리라도 늘리려는 건가? 만일 그게 사실이라면 중독의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병원에서 진정제 처방을 받고야 말겠다!
...아니. 그게 아니면 최근 들어 몸이라도 안 좋아진 건가? 세월아 내월아 하고 푹 퍼져 살아온 나머지 몸이 허해져서? 그렇다면 한의학 병원에 가서 체질 감별을 받은 다음 보약 한재 지어먹는 편이 빠르다던데. 그러고 보니 얼마 전에 프라우 보우, 아니 이제는 프라우 고바야시 부인이구나. 하여간 그녀가 전화 통화에서 하야토에게 얼마 전에 보약을 먹이느라 좋은 병원을 수소문했다는 소리를 들은 적도 있는 것 같다. 결혼해서 잘 살고 있는 청년에게 웬 보약인지는 몰라도, 하여간 약 지었다는 병원을 한번 물어나 볼까.
"...귀찮아."
아무로는 어깨를 으쓱 한 다음 침대 바닥에 발을 내려놓았다. 그러자 시키지도 않았는데 자동으로 커튼이 젖혀지면서 강렬한 햇빛이 방으로 밀고 들어왔다. 그리고 이내 집사가 방문 밖에서 말을 걸어왔다.
"일어나셨습니까? 아침 준비는 어떻게 할까요?"
"곧 씻고 나가겠습니다. 오늘은 커피 말고 우롱차로 주세요(건강을 챙겨야 한다!). 기지에는 못 가볼 것 같다고 연락해 주시고."
"알겠습니다."
집사의 발걸음 소리가 멀어지자 아무로는 샤워실로 곧장 들어가는 대신 침대에 주저앉은 채 이번의 집사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잠드는 시간만큼이나 일어나는 시간 또한 천차만별인 아무로의 다음날 기상시간을 매일 꾸준히 맞춘다는 건 아무로 자신에게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것을 이번의 집사 역시 어렵지 않게 해내고 있는 것이다. 처음 집사 노릇을 하는 사람이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 또 당한 거겠지, 역시.
첫 번째 집사는 일거수 일투족을 녹화하여 정리한 뒤 군에 보내고 있다는 것을 들킨 뒤 바로 잘렸다.
두 번째 집사는 카메라 위치를 바꾸다가 걸려서 그 날로 짐을 쌌다.
세 번째 집사는 꽤 오래 머물렀지만, 차가 고장나서 뜯다가 우연히 통신기가 튀어나오는 바람에 해고되었다.
이런 식으로 최근 일 년 동안 집사만도 무려 일곱 명이 바뀌었다. 한때는 하도 징글징글해서 혼자 살아보려고도 했지만, 그때마다 납득하기 힘든 사고가 터졌다. 돌풍으로 유리창이 죄다 깨진다던가, 비가 와서 도로가 침수되는 바람에 준비해둔 식료품이 없어서 구호차량이 올 때까지 이틀을 굶어야 했다던가 하는 식이었다. 결국 아무로는 이 재앙에 두 손 들고 새로 여덟 번째 집사를 들였다. 가정부를 추가로 들일 필요가 없도록 일부러 몰래 신문광고를 내서 나이든 부부를 골랐지만, 한 달도 못 되어 미심쩍은 부분이 생겨 버린 것이다. 이렇게 된 이상 며칠 주의해서 지내다 보면 증거가 나올 게 거의 확실해 보였다.
- 뭐어, 눈치 채일 정도로 성실하다는 점에서는 처음 해본다는 말이 맞는 것 같기도 하지만.
어쩔 수 없는가보다, 하고 아무로는 한숨을 쉰 뒤 샤워를 하러 들어갔다.
자신이 감시를 받고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을 때는 불쾌했고, 실망했고, 격노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런 감정도 만성적인 것이 되고 말았다. 어차피 아침에 제시간에 일어나지도 못하고 악몽을 꾼 후 침대에서 어린아이처럼 훌쩍이는, 전형적인 전쟁 후유증 환자의 일상을 보고하는 게 뭐 그리 대수이겠는가 싶기도 했다. 어떤 사람이 들어오든 마찬가지일 거라면 굳이 다른 사람으로 바꿀 필요가 있을까.
샤워를 마치고 나오자마자 집사가 방안으로 새 옷을 들고 들어왔다.
"아침은 어디서 드시겠습니까?"
"여기에 차려 주세요."
"알루르 양과 드시지 않으시겠습니까?"
"아."
아무로는 입을 다물었다. '알루르 양'의 일은 아예 잊고 있었던 것이다. 요 근래에 이곳이 휴양지로 인기가 좋아졌는지 여러 사람들이 단체로 놀러오는 일이 꽤 잦아졌는데, 가끔 피치 못할 사정으로 호텔 대신 아무로의 집이나 혹은 이 근방의 다른 집에서 묵어 가는 경우도 있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묵으러 집에 들어오는 사람들이 하나같이 젊은 여성이라는 점이었다.
처음에는 쑥스러운 나머지 말도 제대로 못 걸고 그녀들을 피해 도망을 다니던 아무로였지만, 이제는 제법 익숙해져서 새로 만나는 아가씨들과 은근히 농담을 주고받는 일에도 점차 익숙해지고 있었다. 어차피 간단한 식사와 방을 제공한 다음, 뒷일을 죄 집사 부부에게 맡겨 놓기만 하면 금새 착한 사람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큰 노력 없이도 젊은 여자들에게 구세주 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걸 신이 내려주신 행운이라 생각해버리면 그만이었다.
그렇지만 익숙해 졌다고 부시시한 얼굴인 채 같이 아침 식사를 할 정도는 아직 아니다.
"식당에 챙겨 드리세요. 저는 그냥 여기서 먹겠습니다."
집사의 얼굴에 묘한 기색이 조금 돌았지만 아무로는 그것을 못본 척 하고 옷을 갈아입으며 시계를 보았다. 0083년 11월 22일 오전 10시 24분, 기지에 놀러라도 가보기엔 너무 늦은 시각이었다. 어차피 그가 가건 안 가건 돌아가는 데에는 별 차이가 없는 기지. 열심히 신경을 써 줘야만 할 필요는 없었다. 그래도 나이 지긋한 하사관들에게 전화는 한번 해 줘야 하지 않을까 싶었지만, 드문 일도 아니니 그냥 그러려니 할거라는 생각이 들어 그는 결국 반쯤 들었던 수화기를 다시 내리고 말았다.
* *
집사가 날라온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정원으로 나간 아무로는, 그전부터 하던 자가용 비행기의 보수를 시작했다. 그러나 못해도 두어 시간은 정신을 팔 수 있겠거니 하고 생각했던 그 일에도 30분이 채 못되어 손이 멈추었다.
'엔진을 좀 작은 걸로 바꿔 달아도 되지 않을까...이제는....'
원래 이 비행기는 후라우와 하야트의 결혼식 때 아무로가 축하를 겸한 깜짝 곡예비행을 해 주기 위해 자작으로 만들기 시작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 작업은 왠지 예상보다 하루 이틀씩 늦어지기만 했고, 정작 결혼식 전날에서야 곡예용으로 계산했던 엔진이 예상했던 것보다 출력이 너무 작다는 데에 생각이 미쳤던 것이다. 엔진을 교체하는 작업을 밤새도록 했지만 결국은 곡예 비행을 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결혼식에 그냥 참석하는 데만도 허둥지둥 가다가 하마터면 지각을 할 뻔했다.
땀 뻘뻘 흘리며 식장에 뛰어들었을 때는 얼마나 미안했던지 모른다. 무슨 언론인입네 하면서 글을 휘갈겨 먹고사는 예전 동료 가이 시덴은 '병신 삽질하네'라는 한마디로 표현해 버리고 말았지만.
나중에서야 그런 어이없는 실수가 행복한 두 사람에 대한 질투에서 비롯되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다지 인정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리고 또 인정한다 해도 이미 늦은 일이었다. 그 일로 사이가 틀어진 세 꼬마와는 아직도 화해를 하지 못하고 있으니 말이다.
"멋진 비행기네요!"
"병신 삽질의 산물인걸요."
"네?"
"아, 아닙니다. 알루르 양, 맞으시죠? 제가 이 집 주인 됩니다."
"얘기 들었어요. 아무로 레이 씨라면서요? 토크쇼에서 뵌 적이 있는 분 댁에 묵게 될 줄은 몰랐어요."
"네에...."
느닷없이 나타나 말을 걸어온 아가씨는 꽤나 당돌한 성격을 지닌 듯 했다.
"언제 완성되죠? 저도 태워주실 수 있나요? 친구들한테 자랑해 봤으면 좋겠어요. 아무로 레이 씨와 단둘이서 비행기를 타 보았다고 말이에요."
아무래도 당돌한 게 아니라 뻔뻔스럽기까지 한 것 같다.
"3-4일은 더 걸려야 할 것 같은데요. 아직 엔진이 완전하지 못해서."
"어머, 신세만 질 수 있으면 그정도는 있을 수 있는 걸요."
아무로의 목소리에 가시가 돋쳐도 그 아가씨는 별로 신경 쓰는 기색이 아니었다. 전후 3년 내내 휴가다운 휴가를 못 써 봤다는 둥, 이번에는 마음먹은 만큼 실컷 놀다가 갈 거라는 둥 뒤에서 이런저런 잡담을 해 대면서 비행기 옆을 떠나지 않았다.
아-아. 자가 비행기 만드는 사람 처음 보나. 비행기에 태워서 차라리 저 멀리로 던져 버릴까보다.
아무로는 시선을 돌리기가 싫어 스패너를 손에 든 채 나사를 조이는 시늉만 하고 있다가 문득, 이 비행기를 몰고 확 도망가 버릴까 하는 궁리를 시작했다. 그것은 군의 감시자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난 이후로 줄곧 머리를 떠나지 않던 상상이었다. 상상하는 것만큼은 어차피 엿보기도 불가능할 테고.
그 동안 감시를 하는 사람들이나 방법 따위는 대충 살펴 두었고, 뉴타입이란 결국 별 거 아니라는 인상도 계속 줘 왔던 탓에 감시망 자체가 점점 느슨해지는 것도 느끼고 있던 터였다. 잘만 한다면, 여기저기로 숨어 다니면서 가이처럼 눈에 띄지 않게 살 수 있을런지도 몰라. 아무로는 묘한 기쁨 같은 것을 느끼며 엔진은 그대로 둔 채 비행기 조립을 끝내기로 마음먹고 진지하게 엔진의 결합 상태를 점검하기 시작했다.
그 때 집사가 전화기를 들고 나타났다.
"아무로씨, 기지에서 전화입니다."
"기지에서요?"
아무로는 놀라서 집사로부터 수화기를 받아들었다. 자다가 봉창 두들기는 것도 아니고 이게 무슨 일인지.
"네, 아무로 레이입니다."
"아, 아무로 군인가? 날세! 안 나오고 뭐 하는가?"
"아, 소위님이십니까? 오늘 일직이세요?"
전화를 걸어온 사람은 그를 항상 '아무로 군'이라고 부르는 나이든 소위였다. 자신을 애 다루듯 하기는 했지만 마음 씀씀이가 좋은 사람이라 아무로는 제법 그에게 호감을 갖고 있는 편이었다.
"응, 오늘이 내 일직날이지. 그런데 자네 좀 나와 줘야겠어."
"무슨 일 있습니까? 저는 쉴까 했는데요."
"어제 다 부서진 콜로니가 하나 지구로 떨어진 모양인데, 그게 어떻게 된 게 북미 대륙이라더구만. 인명피해가 별로 없는 모양이니 큰 일은 아니지만, 진도(震度)자료 따위를 올려야 하지 않겠나. 난 프로그램 같은 데는 워낙 젬병이라서 말이야! 자네가 좀 와 줘야겠어."
"네? 콜로니가 떨어졌다고요?"
"그렇다니까! 자세한 건 모르겠고, 스페이스노이드들이 한 짓이라더군. 오늘 못 올 것 같으면 내일이라도 나오게나. 보고 올리는 덴 자네 손이 좀 필요할거야."
"...알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다음, 아무로는 잠시 멍하니 수화기를 손에 든 채 꼼짝도 하지 못했다.
그러면 아침에 꾸었던 그 꿈은 꿈이었던 게 아니라....
콜로니가 대지로 서서히 접근하고 있었다. 콜로니의 외벽에서 깨져 나온 파편의 조각들은 무리를 이루어 콜로니와 함께 자브로 상공 위로 사라져갔다. 대기권에서 반짝거리며 불타올라 소실되어 가는 유리 조각들은 마치 별의 조각들을 흩뿌린 것처럼 보였다. 점점이 불타오르다 금새 사라지던 파편들.
- 지온이겠지.
그런 일을 할 사람들이 이 지구권 다른 어디에 있을 수 있겠는가. 아니 꼭 지온은 아닐런지도 모른다. 다른 테러 집단이 그런 일을 도모하고 실행에 옮겼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지온 외의 다른 누군가가 콜로니를 지구로 떨어뜨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지구에 스스로의 집을 던져버릴 수 있는 악당들, 그것에 바로 지온이고 스페이스노이드였다. 방금 전 전화를 걸어온 소위 또한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 않던가.
- 그들은 절대로, 자기들이 어떤 짓을 한 건지 알지 못할 거야.
정확한 정보를 갖고 있거나 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아무로는 그들이 떨어뜨린 콜로니 덕분에 연방의 분위기가 더욱 강한 친 어스노이드 인사에게 힘을 몰아주게 될 것이라는 점을 예측하고 있었다. 스페이스노이드와 공감대가 형성되었던 장군 한둘쯤은 책임을 지고 물러나야 할 테고, 어쩌면 테러를 담당하는 특수부대가 새로 생길지도 모를 일이다.
그리고 결국 감시는 더욱 강해질 테지. 이제는 결코 달아날 수 없을 것이다.
근거 없이도 충분하리만치 밀려오는 패배감.
아무로는 나지막히 한숨을 쉬었다.
"왜 그러세요? 뭐가 잘 안 되시나요?"
"아 네, 엔진을 좀 작은 걸로 갈아야 할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너무 무리하지 마세요. 잠깐 쉬어요. 저한테 이 동네 안내라도 좀 해 달라구요."
아무로가 처음으로 그녀 쪽을 돌아보자 그녀는 윙크를 해 보이며 한 걸음 앞으로 다가왔다. 그녀는 꽤 예쁜 편이었다. 긴 머리가 반쯤 드러낸 가슴께까지 찰랑거렸다.
연방에서 여자들을 자신에게 보내는 것은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 계절에 관광지로 유명하지도 않은 이곳에 휴가를 온다는 여자들이 그렇게 많을 리가 없겠지. 그것은 집사가 자신을 감시한다는 것만큼이나 분명하게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더욱 가까이 하기 어려웠던 것이었는데.
"아침은 드셨습니까? 점심이라도 같이 하실까요?"
"좋아요!"
그녀는 큰 소리로 웃은 뒤 스스럼없이 아무로의 팔에 자신의 팔을 끼었다. 팔짱을 낀 채 현관을 스치고 지나가면서, 아무로는 집사의 입가에 살짝 미소가 걸린 것을 볼 수 있었다. 분명 자기 목이 무사하게 되었다는 안도감에서 나오는 웃음이겠지.
그러나 이제 아무려면 어떻겠는가. 누구나 바라는 것은 단지 오늘의 안녕 뿐.
아무로는 더 이상, 저항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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