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웅. 우웅. 우우우웅.
  어딘지 모를 곳에서 들려오는 낮은 진동음만큼 잠을 방해하는 소리도 드물다.

  "...어우, 뭐야."

  선잠을 자던 소년은 베개에 푹 파묻혀 있던 얼굴을 가까스로 끄집어내서 목욕한 개가 물 털어내듯 얼굴을 후르륵 털었다. 하지만 그 정도로는 팅팅 부은 채 감겨있던 눈을 완전히 뜨이게 하기에는 역부족. 흐릿한 눈으로 어두운 방안을 휘휘 둘러보는 정도로는 귓바퀴를 괴롭히는 소음의 정체를 파악할 수가 없었다.
  아니, 정체를 파악하기도 전에 점점 더 시끄러워 지고 있었다.

  "누구야, 짜증나게...우악!"

  엎드려있던 몸을 확 일으키던 소년은 짧은 비명을 지르며 다시 침대 위로 고꾸라졌다.
  하교 후에 가방을 방 한가운데 아무렇게나 던져버린 다음 씻지도 않고 잠옷으로 갈아입지 않은 채 엎드려 잠든 나쁜 아이는 이렇게 벌을 받는 법이다. 더군다나 학교에서 같은 반 아이들과 치고 박고 싸움박질까지 하고 왔다면 더더욱 개선의 여지가 없지 않겠는가.
  당신은 나쁜 아이예요. 근육이 뭉치는 것도 당연한 벌입니다.
  결국 소년은 끙끙 신음소리를 내며 몸을 뒤집은 다음 한참이 지나서야 침대에서 몸을 일으킬 수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덕분에 흐리멍덩하던 정신을 번쩍 차렸다는 것이다. 다리를 들어서 바닥을 밟고 일어서는 작은 동작에도 세심한 주의가 필요한 마당에 넋 놓고 있다가는 자칫하다 뇌진탕으로 죽을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겨우겨우 일어나 굳어진 어깨를 돌리며 주위를 둘러보니 잠을 깨운 묘한 소음은 방에 오자마자 가방을 던지며 열어두었던 창문으로부터 흘러들어오고 있었다. 물론 1층에 아이들 방이 있는 경우에 창문을 열어둔다는 건 대부분의 콜로니에서 금기사항이지만, 군 소속 인사들이 많이 이주하고 있는 곳의 경우는 어느 정도 예외라는 것이 존재하게 마련. 잘못 걸리면 최소한도 사형이 보장되는 이 동네에서 한탕을 저지를 만큼 용감한 유괴범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나 자연법칙은 어디나 동일한지라 이곳에서도 창문을 열어둘 경우 절대 피할 수 없는 것이 있다.

  "이사하나. 되게 시끄럽네...헷취!"

  그것은 바로 소음과 먼지.
  공해를 완벽 차단하기 위해 잔뜩 찌푸린 얼굴을 손으로 가린 채 창문 쪽으로 다가가던 소년의 귀에 귀를 울리는 소음 이외의 소리가 들렸다. 삐리리릭. 삐리리리릭. 전화 받으세요.

  "!"

  소년은 몸을 홱 꺾어서 책상 위의 모니터로 방향을 돌렸다. 열린 창문으로 들어오는 소음은 씹혔고 먼지는 무시되었다. 뭉친 근육이 소리 없이 비명을 질러대었지만 소년은 까딱하면 책상 모서리에 사정없이 부딪칠 위험을 과감히 무릅쓰고 수화기를 끌어당겼다.
  급한 일과 중요한 일 중에 해야만 하는 일은? 정답. 좋아하는 일이다.

  "여보세요! 엄마?"
  "카미유, 들어와 있었구나."

  언제나처럼 어머니의 등뒤로 작업장의 모습이 여과 없이 비춰졌다. 군의 규정상으로야 작업장 등등의 부대시설이 보이지 않도록 배경차단장치를 가동시키거나 주위가 막힌 장소에서 외부로 전화를 걸도록 되어 있지만, 그녀는 그런 규정조차 신경을 쓰지 못할 만큼 일에 몰두해 있는 경우가 많았다.

  "엄마, 엄마! 나 오늘...."
  "바빠서 길게 얘기할 시간이 없구나. 내일 저녁까지 집에 못 들어갈 것 같아 전화했다. 먼저 자고, 내일 아침에 학교 꼭 가거라. 끊는다."
  "엄마...!"

  전화는 그대로 끊겼다.
  이미 컴컴해진 모니터를 향해 외쳐 보았자 소용없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카미유는 손에 든 수화기를 향해 고함이라도 치고 싶은 기분을 느꼈다.

  - 내 얼굴에 붙인 반창고가 안 보여?

  어머니가 커리어 우먼이고 바쁜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때로 그런 배경은 자랑이 되기도 한다. 여자 같은 이름이라며 놀리며 싸움을 걸어오던 녀석들도 소위가 된 지 한참이나 되어 가는 어머니가 한 번만 나서 준다면 꼼짝도 못 할 것이다. 한 주일에 서너 번씩 시비를 걸어오는 녀석들을 상대하노라면, 마마보이라는 소문이 나더라도 어머니에게 그 녀석들을 좀 혼내달라고 부탁하고 싶어지곤 했다.
  하지만 어머니는 아들을 자세히 보지도 않을 뿐 아니라 아예 말 한 마디도 안 들어주지 않는가.

  - 내 팔에 남은 멍 자국이 안 보여?

  조금만 신경을 써 준다면 그걸로 만족할 수 있을 텐데.
  어머니는 내 어머니이기를 싫어하는 걸까.
  내가 학교에서 싸움이나 하고 돌아다니는, 말 안 듣는 나쁜 아이라서?
  뇌수가 녹아 눈으로 배어나오는 듯한 느낌이 소년의 몸을 줄달음질쳤다.

  - 내 상처가, 안 보여?

  "흐아...!"

  계집애들처럼 질질 짜기는 싫다고 생각하면서도, 끝내 카미유는 이를 악문 채 멍이 든 양팔로 얼굴을 감싸안고야 말았다.

                                                  *                                   *

  "...후에취!"
  눈물을 그치고 나서 먼지 때문에 재채기가 터져 나온 다음에야 창문을 닫으려고 했다는 것이 생각났다. 카미유는 주먹으로 눈에 남은 눈물을 쓱 닦아버리고 열려 있는 창을 향했다. 소음의 원인은 옆집에 세워져 있는 이사용의 거대한 엘레카. 먼지도 짐을 오르락내리락하는 과정에서 생긴 모양이었다.

  "화아-대일닥터 찾았다, 얼른 와!"
  "응!"

  이웃이 될 사람들은 동양인 부부와 딸처럼 보이는 카미유 또래의 여자아이였다. 가족은 셋 뿐인데도 옮겨지는 짐의 양이 터무니없을 정도로 많은 것이, 우주로 막 이민 온 가족이라는 느낌을 착실하게 전하고 있었다.

  "함부로 도와주겠다고 나서지 마. 이렇게 다치잖니!"
  "그래도 해보고 싶었는데...."
  "아이구 우리 마음씨 착한 딸. 하지만 다치면 안되니까, 지금은 저쪽으로 물러나 있어, 응?"
  "당신도 참. 너무 오냐오냐 하지 말아요. 어? 저기 친구 있네? 인사하고 와!"

  어머니나. 창문을 닫을 사이도 없이, 온 가족의 시선이 카미유에게로 꽂혔다.
  얼굴이 말이 아닐 텐데 싶어 얼른 블라인드 뒤로 얼굴을 숨겨 보았지만 여자아이는 카미유가 몸을 반쯤 숨기고 있는 창문 앞으로 망설임 없이 달려와 명랑하게 말을 건넸다.

  "안녕!"
  "아...안녕."
  "어? 다쳤네? 나도 다쳤어! 자, 봐."

  여자아이는 활짝 웃으면서 반창고를 붙인 팔을 휘휘 저어 보였다.

  "이삿짐 옮기다가 넘어졌어. 너도 넘어진 거야?"
  "어...응."
  "다치면 아프잖아-너도 아프지?"

  카미유는 왠지 눈물이 또 나올 것 같아서 입을 꼭 다물었다.

  - 내 상처가, 보여?

  바라고 있던 것을 기대조차 하지 않았던 상대에게서 얻게 되다니.
  이렇게나 아무렇지 않게 내가 듣고 싶었던 말을 해줄 수 있다니.
  부러움과 부끄러움이 동시에 밀려들어와 자신을 올려다보는 맑은 눈에 반사되었다.
  몇 번인가 목을 가다듬은 다음, 카미유는 한창 움직이고 있는 엘레카를 바라보는 척 하면서 말을 건넸다.

  "이름이 뭐야?"
  "난 화야. 화 유이리이. 너는?"
  "나는...카미유, 카미유 비단."
  "좋은 이름이네-."
  "정말로?"
  "발음이 좋아. 다른 대륙 쪽 이름은 잘 모르지만 말야. 전에는 쭉 차이나타운에서 살았거든."
  "그렇구나."
  "그래서 짐이 많아. 엄마가 프라이팬 같은 걸 하나도 버리기 싫다고 그러는 거 있지! 왜냐하면 요리할 때...."

  화는 어느 새 창문에 바싹 달라붙어 카미유에게 이런저런 얘기를 건네기 시작했다.
  먼지가 날려서 수도 없이 재채기를 해 가면서도, 두 사람은 이날 만나자마자 마치 오랫동안 사귄 듯 절친한 친구가 되었다.

2009/02/10 15:30 2009/02/10 15:30

Trackback Address >> 이 글에는 트랙백을 보낼 수 없습니다

댓글을 달아 주세요